학습전략은 이렇게! 산업안전기사 과목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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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을 앞두고 가장 고민했던 것은 전공을 살릴까 말까였어요. 쉽게 결정하지 못했던 것은 전공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사 시험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한 수능시험이 끝나고 책상 앞에 앉은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죠. 대학 중간 혹은 기말고사 시험은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고, 제대로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안 했다고 보셔도 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저의 선택은 산업안전공학 전공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4년 동안 배운 게 아깝고 새로운 걸 다시 배우고 시작해야 하는 막막함이 시험 공부에 대한 부담보다 더 컸죠. 이렇게 진로를 결정한 뒤 본격적으로 산업안전기사의 시험정보를 알아봤습니다. 아무래도 수험생이라 시험 난이도가 제일 궁금했어요. 조사해 보면, 최근 5년간의 필기 시험 합격률은 평균 40%대였습니다. 가장 최근 시행한 2020년도는 58.3%였습니다. 실기시험도 40% 중반대에서 비슷한 수치를 보였습니다! 생각보다 시험 난이도가 어려운 느낌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방심은 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수치상의 정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시험일정을 확인했습니다. 제가 공부한 2021년도 산업안전기사 시험일정은 필기는 3월 7일, 5월 15일, 8월 14일 총 3회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실기시험은 4월 25일, 7월 10일, 10월 16일이었어요. 일년에 3번밖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데다가 시험날짜와의 텀도 긴 편이라 한번에 합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공부하고 시험을 봐야겠다고 느꼈고 그래서 저는 4개월 후에 있을 정기 2회, 5월 15일 시험을 목표로 정했습니다. 목표일까지 정하고 나서 퍼즐이 하나하나 합쳐지는 느낌이 들어서 이 기세를 몰아 세부 사항까지 조율하면서 학습 플랜을 세웠습니다. 산업안전기사의 시험과목은 필기시험은 안전관리론, 인체공학 및 시스템안전공학, 기계위험방지기술, 전기위험방지...

연산군가계도 무오사화

 당연히 그의 장지는 '릉'이 아니라 '무덤'이었으며 왕릉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초라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네이버블로그] 연산군 두둥실 운평 최헌 사장님 녹수 https://mblog.naver.com/justmeet/222210221394 연산군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많은 기생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실제로 열었어... m.blog.naver.com


연산군 가계도연산군은 성종의 아들이다. 성종은 모두 3명의 왕비를 두었다. 첫 번째 왕비는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로 11세 때 자을산군(성종)과 혼인하였고, 13세 때 성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병약하기 때문에 18세 때 죽는다.

두 번째 왕비는 후궁 가운데 선택하였다. 이때 뽑힌 여인이 숙의 윤씨. 후궁 신분으로 이미 성종의 후사를 두었는데 중전에 뽑힌 지 4개월 만에 아들이 태어난다. 아들은 단종 이후 35년 만에 태어난 적장자로 이 포스팅의 주인공 연산군이다.

그러나 투기가 워낙 심해 마침내 성종이 다른 후궁과 잠자리에 들었던 어느 날 몸싸움을 하면서 용 속에 손톱자극을 남기는 중죄를 저질러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어머니 인수대비의 눈독을 들일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폐위된 뒤 사사되고 만다.

어린 아들 연산군만 남겨두고 둘째 부인도 잃은 성종은 또 다른 후궁을 왕비로 맞이한다.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이다. 두 부부 사이에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태어난다. 연산군이 폐위된 뒤 왕위에 오른 조선 11대 왕 중종이다.

무오사화&갑자사화

사화란 사림파 학자가 탄압을 받아 살해된 사건을 말한다. 연산시절 유명한(?) 사화가 2건 있었다.

무오사하

무오의 해인 1498년(연산 4년)에 발생하였다. 조선 전기 사림의 우두머리로 추앙받던 김종직이 부관참시된 사건이다.

관을 베는 시체

: : 쪼개는 부관 : 널관 : 벨 참시 : 시체

글자를 풀이하면 관을 쪼개 시신을 다시 베겠다는 뜻이다. 대죄가 드러났는데도 이미 죽어서 죄값을 물을 수 없으니 무덤이라도 파헤쳐 얼버무리는 형벌이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시절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이 자신의 비리(?)가 사초에 기록된 것을 삭제하기 위해 로비를 벌이다가 불거진 사건이다. 사초 자체가 당대에 공개돼서는 안 될 문서였기에 이 사건으로 무덤이 파헤쳐진 김종직은 참으로 억울했을 것이다.

김종직은 수양대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사건에 빗대 조의제문이라고 비난했는데 그 제자 김일성이 이를 사초(四楚)에 기록한 것이고, 그 사초가 이극돈에 의해 유출되어 연산군을 분노케 했다.

조의제문을 직접 쓴 김종직의 묘는 파헤쳐졌고, 그 글을 사초로 옮긴 사관 김일성은 능묘에 처해졌으며, 표말 김홍필 정여창 임희재 등 김종직의 제자들은 유배됐다.

그 영향으로 사림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연산군은 자신의 말끝마다 "안됩니다"를 외치는 대간을 제압하는 정치적 효과가 있었던 사건이다.

갑자사화

무오사화가 정치적 필화사건이었다면 갑자기 사화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를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분풀이였다.

생모인 폐비 윤씨에게 독약을 갖다준 이세좌라는 사람이 있었다. 연산군 시절 예조판서의 자리에 있다가 연회에서 술을 왕의 옷에 쏟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파면하고 귀양 보냈다. 연산군의 생모에 대한 복수가 시작된 시점이다.

폐비 윤씨와 대척점에 있던 성종의 후궁 숙의 윤씨를 고문하고 그들의 아들을 채찍으로 때리는 등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죽인다.

그리고 폐비에 찬성한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그중에는 1인회도 있었다. 독회는 이미 죽은 몸.. 무덤이 파헤쳐지고 이미 해골이 된 그의 머리는 드러났다.

폐비 윤씨 또는 제헌왕후

갑자사화 직후 연산의 생모 폐비 윤씨는 신원되고 제헌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무덤도 회묘에서 회릉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연산의 폭정은 오래가지 않아 2년 뒤 박원순 성희안 등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고 만다. 제헌왕후는 다시 폐비 윤씨로 강등됐고, 그녀의 묘 역시 회묘로 돌아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회묘는 현재 고양 서삼릉에 위치하고 있다.

연산군 폐위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 보낸다. 지금은 차로 이동할 수 있지만 그때는 배를 타고 강화도까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교동도까지 가야 했다.

그나마 오래 살지 못했다. 사망 후 우이동에서 방학동으로 이어지는 길, 북한산 둘레길 20구간 왕실묘역길 안에 연산군 묘소가 소박하게(?)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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